예종석의 'CEO에게 보내는 편지' <16>
K 사장님!
첫 눈이 왔습니다. 12월에 접어드니 본격적인 추위도 시작되고 망년회 모임도 잦아지는 등 연말 분위기가 만연해지는군요. 오늘은 시기적으로도 느슨해지는 때이고 해서 조금 부드러운 주제인 최고경영자의 취미생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초고속 압축성장을 주도해 온 우리 경영자들에게 취미생활은 한동안 다분히 사치스러운 것이고 한가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1세대 경영자들 중에는 취미가 무어냐고 물으면 "일이 취미"라고 답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었지요. 전쟁의 참혹함을 체험했고 근검절약이 지고의 가치였던 개발연대를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에게는 그런 사고방식과 생활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 최고경영자들의 신상명세서 취미항목은 독서 같은 구태의연한 모범답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사실 독서야 경영자들에게는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이지 재미로 하는 취미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글로벌 경쟁시대에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의사결정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최고경영자들에게 취미생활은 생활의 활력소이며 강력한 스트레스 해소책이자 소중한 재충전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취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강을 지키는 수단이며 일상 업무로부터의 탈출구가 되기도 하지요.
선진기업의 경영자들은 다양한 취미생활로 자신만의 시간과 여유로움을 즐깁니다. 예를 들어 CNN의 창업자 테드 터너 회장 같은 이는 요트맨으로 유명하지요. 11세부터 시작된 그의 요트 타기는 취미를 뛰어넘어 1977년에는 아메리칸 컵을 차지하기도 했고 영국의 패스트넷 레이스에서도 우승하는 등 프로의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그는 요트 외에도 여가시간에는 몬타나의 한적한 통나무집에 머무르며 찦차를 직접 운전하고 목장길을 달리면서 망중한을 즐긴다고 합니다.
맥 휘트먼 이베이 회장은 여성경영자 답게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선호해 겨울에는 스키를, 여름에는 플라이낚시를 즐긴다고 하지요. 유명식당체인인 베니하나의 창업자 록키 아오키는 열기구 조종과 스피드보트 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외국의 경영자들은 스쿠버 다이빙이나 격투기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기도 하고 카 레이스나 비행기조종 같은 위험한 취미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연전에는 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이자 잡지 '조지'의 발행인이던 존 F 케네디 2세가 비행기조종을 하다가 추락사한 사건도 있었지요.
우리나라 경영자들의 취미는 비교적 단순해서 골프, 등산 등이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는 경영자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뜨입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오디오와 영화 마니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동차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고 최근에는 환갑을 넘긴 나이임에도 스키를 배워 심취하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특이한 새 관찰 취미로 유명한 경영자입니다. 그는 여의도 트윈타워의 사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밤섬의 새들을 틈틈이 관찰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젊은 경영자들 중에는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고 산악자전거 시합과 철인3종 경기에 출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주말농장의 텃밭 가꾸기나 사진촬영 같은 정적인 취미를 즐기는 경영자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근세 중국의 계몽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그의 취미론에서 "무릇 사람은 항상 취미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생활이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취미가 바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취미가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처럼 건조한 생활과 연속적인 긴장 속에 묻혀 사는 이들에게 취미생활은 더욱 긴요한 것이겠지요. 그들에게 취미를 통해 얻는 여가는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 일 것입니다.
저는 최고경영자의 취미는 '잊기 위한 취미'와 '얻기 위한 취미'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현명한 경영자라면 그 두 가지를 다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잊기 위한 취미라 함은 업무의 스트레스를 잊고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취미로 동적인 스포츠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스키나 마라톤 같은 격렬한 운동은 운동 중에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순간적으로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스키장의 정상에서 출발하는 스키어는 그 순간에는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 잡념 없이 스키에만 집중합니다.
마라토너는 스타트 후 일정시간이 지나면 알 수 없는 쾌감 속에서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지요. 그런 절정감을 지칭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전문용어가 다 있을 정도이니 그 효과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잊기 위한 취미는 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지요.
얻기 위한 취미는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구상할 수 있는 사색적인 취미로 원예나 사진촬영, 낚시 등의 정적인 취미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등산 같은 취미는 양쪽에 다 해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분류가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얻기 위한 취미는 취미를 즐기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자기성찰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자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취미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효과적인 리더들은 스스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잭 웰치는 5년마다 스스로에게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다음 5년간 역점을 두어야 할 분야를 선정하고 그리고는 "그것과 연결된 과제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자답해서 자신이 맡을 과제와 다른 적임자에게 위임할 과제를 분류했다고 합니다. 효율적인 리더들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 법입니다. 얻기 위한 취미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취미입니다.
우리 경영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골프는 사람에 따라서는 잊는 것도, 얻는 것도 불가능하게 하는 취미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골프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 진행상황에 따라 스트레스가 풀리기 보다는 더 쌓일 수도 있는 취미이지요. 시간소요가 많은 취미인데 반해 일행과 함께하는 운동이라 사교는 가능해도 사색하기는 힘이 드는 취미입니다. 많은 경영자들이 즐기는 골프를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골프를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시달리는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아서 드려본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존경받는 경영자 도꼬 도시오(土光敏夫)는 작은 공을 갖고 놀기 보다는 큰 공(지구)을 갖고 노는 것이 더 좋다면서 집 앞의 텃밭을 가꾸며 사색을 즐겼다지요. 그는 경영자들에게 하루에 30분쯤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쉬면서 사업에 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드리다보니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인 취미생활 마저도 일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 대단히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만 리더의 삶이 그런 것 아니겠냐는 항변과 취미와 일을 병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일석이조의 전범이 되지 않겠느냐는 억지로 변명에 대신하겠습니다.
연말에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